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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둥이
장병원 기자 <밀애>이후 영화는 끊었으니 벌써 2년이다. 그동안 미국에서 뭘한 건가? 김윤진 영화 쪽, 독립영화 쪽, TV 쪽 두루 미팅을 하고 다녔다. 미국이란 나라는 자기 홍보를 능숙하게 해야 하는데 처음엔 쑥스러워서 혼났다. 막상 내 소개를 하려니까 나는 뭘까? 김윤진이라는 배우의 장점은 뭘까?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내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얘기하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김세윤 기자 미팅이라고 한 건 오디션을 말하는 건가? 김윤진 오디션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미팅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려면 우선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미국의 에이전시 빅 5로 분류되는 곳을 다 찾아다니며 미팅을 했다. 한국에서 출연한 작품들을 편집해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서 각 회사에 보내면 그걸 보고 연락을 해왔다. 그중 리즈 위더스푼, 멕 라이언 등이 소속된 윌리엄 모리스라는 곳과 좋은 조건에 계약을 맺게 됐다. 어디는 양자경, 어디는 루시 리우가 속해 있어서 내가 가면 끽해야 동양 여배우 넘버 2밖에 안될 것 같았는데 윌리엄 모리스에는 이렇다 할 동양 배우가 없다는 게 선택의 이유였다. 에이전시와 계약한 뒤로는 각 분야의 캐스팅 담당자들을 만나러 또 미팅을 다녔다.
김세윤 기자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이었겠다. 김윤진 길도 낯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LA에서 거의 1년 넘게 혼자 렌트카 끌고 하루에도 몇 군데씩 각종 미팅을 다녔다. 너무너무 힘들었다. 이 넓은 땅에서 뭘 해보겠다고 겁도 없이 덤빈 건가, 이러다 결과가 안 좋으면 어쩌나, 후회도 많이 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출연했을지 모를 작품들이 크게 흥행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거 보면 아이고, 그냥 한국에서 활동할 걸 하는 후회도 들고.(웃음) 하지만 그렇게 1년 반 정도 고생하고 난 지금은 오히려 잘한 짓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다행히 얼마 전 내가 출연하는 ABC 방송 TV 드라마 <로스트 Lost>의 1, 2부가 방영됐는데 시청률이 6.5% 나왔다. 40~50%대 시청률이 흔한 한국 기준으로는 우습겠지만 미국에서는 대단한 수치다. ABC 방송국 드라마 사상 9년만에 터진 대박이라고 다들 난리가 났다. 덕분에 13부작으로 예정한 시리즈가 22부까지 늘어난다는 얘기도 있다. 내년 4월까진 꼼짝없이 <로스트>에 매어 있을 것 같다.
장병원 기자 드라마 내용이 궁금하다. 김윤진 비행기가 추락해 무인도에 표류한 승객 13명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생존 투쟁을 그린 드라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서니라는 인물로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딸이지만 가부장적인 한국 남자와 결혼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한국 여자다. ‘로스트(lost)’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주요 인물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잃어버린’ 무엇을 무인도라는 공간에서 되돌아보게 되면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새로운 삶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각 인물들의 과거를 번갈아 보여 주는 독특한 형식이라 등장 인물 열세 명 다 한 회씩은 주인공을 맡게 된다.
장병원 기자 13부작이면 일종의 미니시리즈인가? 김윤진 그렇다고 보면 된다. 미국에선 보통 한 시리즈물을 제작하려면 독립 프로덕션들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우선 1, 2회분 정도 제작해 방송국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시리즈를 마저 제작할 수 있다. 한 회당 보통 30~40억 원의 제작비가 드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몇 개씩 만들어 놓고는 그중 채택된 한 두 편만 빼고 태반을 그냥 버리는 거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와, 그 돈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찍으면 몇 편이 나올 텐데, 하는 생각에 너무 아깝더라.
장병원 기자 그럼 당신이 출연한 파일럿 프로그램을 보고 캐스팅한 건가? 김윤진 내가 출연한 파일럿 프로그램은 2회분 만드는 데 150억 원을 썼다. 역대 파일럿 프로그램 중 최고 제작비였다. 그래서 설마 이걸 버릴까 하는 생각으로 내심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던 ABC 방송국 사장이 우리 촬영장에 놀러온 틈에 본사에서 잘려 버렸다. 10년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던 현장에 딱 한 번 나왔는데 그 사이에 자른 거야.(웃음) 그때부터 불안한 거다. 이거 이러다 그냥 엎어지는 거 아닌가 해서.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장병원 기자 보도를 보니 원래 <로스트>엔 당신 배역이 없었다던데. 김윤진 ABC 방송국 쪽 사람들과 미팅하고 3시간 후에 에이전시에게서 전화가 왔다. 섭외가 들어왔다고. 처음 드는 생각은 아니, 나를? 무슨 역할에? 대본을 잠깐 봤지만 동양 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쪽에선 "지금은 적당한 게 없지만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김세윤 기자 없는 배역을 만들면서까지 알려지지 않은 동양 배우를 붙잡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김윤진 오디션 때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TV 드라마 <엘리어스> 시리즈를 연출했고 영화 <미션 임파서블3>의 감독으로 내정된 J.J. 에이브럼스 감독이 이번 시리즈를 총지휘하는데 그 사람 앞에서 오디션을 봤다. 드라마 내용 중 무인도 안에 정체불명의 존재가 있다는 설정이 있다. 그게 외계인인지 괴물인지 아무도 모르는데 하여튼 생존자들을 위협하는 미지의 존재다. 에이브럼스가 질문 있냐고 하길래 없다고 그랬다. 주인공 이름이 케이트인데 ‘케이트도 그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설정이니까 나도 모르는 채로 있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굿 앤서(good answer)!’하면서 탁자를 막 두드리더라. 그때 아, 내가 대답을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것 빼곤 딱히 내가 뭘 잘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감독의 어떤 인터뷰를 보니까 동양 여자의 신비 같은 게 느껴져서 함께 일하고 싶었다고 하더라.
장병원 기자 동양 배우들이 서양인들의 눈에 비쳐질 때 그런 신비감으로 어필하는 면이 많은데 장기적으로 그건 연기의 폭을 좁히는 거 아닌가. 김윤진 혹시라도 그렇게 될까봐 난 의견을 많이 얘기한다. 서니라는 역할이 재벌집 딸이고 남 부러울 것 없는 여자인데 왜 남자한테 쩔쩔매는가 말이다. 에이브럼스는 서니의 어두운 과거를 보여 주기 위해 초반에 조금 과장해서 그린 거고 앞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담을 거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제작진들이 모두 열려 있는 사람들이라 내 의견을 존중해 주지만 때로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가 걱정될 때도 있다. 하지만 거의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그려지면 외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또 한국 교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김세윤 기자 지금까지 발차기를 하지 않고 성공한 동양 배우가 없다고 할 만큼 오리엔탈리즘의 고정 관념이 강한 곳이 미국이다. 결국 당신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있는 거 아닌가. 김윤진 당연히 그런 생각 하게 된다. 태권도를 다시 배워야 되나 고민도 하고.(웃음) 다행히 이 드라마 안에서 발차기는 안 한다. 대신 한의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라 누가 다치면 약초를 구해 치료해 주는 장면은 있다. 그런 걸 보면 오리엔탈리즘을 피할 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에이 못하겠어, 하는 것보다 그 속에서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는 드라마라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만일 시나리오가 완결된 영화였다면 그럴 수 없겠지만 드라마이기 때문에 찍으면서 조금씩 바꿔갈 여지가 있으니까. 백인들 틈에 덤으로 끼워넣은 존재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김세윤 기자 자기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소수 민족이라 한국 배우의 정체성을 내세우기 쉽지 않을 것이다. 김윤진 물론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런 부분은 바꿀 수 있지 않나. 가령 당초 내 회상 신은 한국말을 하다가 어느 순간 영어로 오버랩되는 설정이었다. 지막 읽는 거 싫어하는 미국 사람들 성향 때문에 굳이 영어를 하는 설정으로 끌고 가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니들은 왜 자막 읽는 걸 싫어하냐, 정말 새로운 드라마를 찍고 싶으면 드라마의 3분의 1을 자막으로 깔아라, <로스트>를 보면서 어, 이게 미국 방송 맞아? 하면서 보게 된다면 얼마나 신선하고 재밌겠냐. 물론 나야 재밌지.(웃음)
장병원 기자 그런 요구를 받아주던가? 김윤진 그렇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1시간 방송분 중 30분 동안 한국말이 나간다. 영어로 자막이 깔리고. 미국 드라마에서 그렇게 오래 한국말을 한 건 아마 처음일 거다. 단점도 있다. 일단 언어가 다르면 연기를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우리가 프랑스 배우 연기하는 거 보면 저게 연기를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감이 안 올 때가 있는 것처럼 그네들이 보기에 내 연기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그걸 감수하면서 조금씩 내 목소리를 내면서 작게나마 변화시키려 한다. 그럼, 언젠가 발차기 안 해도 되는 동양 배우가 돼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게 10년이 걸릴 지 20년이 걸릴진 모르겠지만.
장병원 기자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영화도 포기할 수 없을 텐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 좋겠지만 두 마리 다 놓칠 수도 있다. 김윤진 드라마 대신 영화를 한다면 가능하다. 미국에서 한 편 찍고 한국에서 한 편 찍고. 그게 내가 바라는 이상이다. 드라마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시즌 촬영 기간 동안 묶여 있어야 하니까 힘들다. 13부작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시청률 좋다고 22부작으로 늘어나지 않나. 물론 기쁘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또 내년 4월까지 꼼짝없이 미국에 묶여 있어야 하니 문제다. 내년 4월? 한국 관객들이 그때까지 날 기억할까? 그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내년 4월에 끝난다 해도 또 다음 시즌 촬영이 7월에 시작하니까 기껏해야 두 달 반 동안 있는데 그 기간 동안 영화 한 편 하기 빠듯하다. 그런 상황이 좀 스트레스다.
김세윤 기자 듣기 언짢을지 모르지만 일각에서는 <아이언 팜> <밀애> 등의 영화가 잇달아 흥행에 실패한 후 미국 진출로 돌파구를 찾는 거라는 시각도 있다. 김윤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그들의 생각인 걸. 난 아닌데. 그러면 됐지 뭐.
장병원 기자 한국 활동을 접었던 시기가 <밀애>를 통해서 '블록버스터 여배우'라는 이미지를 벗고 나름대로 변신을 꾀하던 시기였던 건 사실 아닌가. <밀애>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도 받았고. 김윤진 내 딴에는 분위기 좋을 때 떠난다고 생각한 거다.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미국에서 일이 이렇게 천천히 풀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뭐든지 굉장히 빨리빨리 진행되는 한국 시스템과 거긴 너무 달랐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큰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 다시 한국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해버리면 기껏 낑낑매고 굴리던 바퀴를 세워야 하지 않나. 에이전시들도 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게 자명하고.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2년이 훌쩍 지나버린 거다. 더구나 멋모르고 TV 드라마 계약을 7년이나 했으니.
장병원 기자 엥, 7년? 김윤진 반응이 좋아서 <섹스 & 시티>나 <X 파일>처럼 시리즈를 이어갈 수도 있으니 미리 그렇게 묶어두는 거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타 방송국의 드라마만 아니라면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영화 출연은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다행인 건, 13부 중 3부에서 내가 맡은 인물이 죽는다고 해도 돈은 13회분까지 다 받는다. 그건 참 좋더라고.(웃음) 장병원, 김세윤 기자 그거 할 만하네(웃음)
장병원 기자 미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게 어릴 적 꿈이었다는데 그런 당돌한 꿈은 언제부터 꾸기 시작한 건가. 김윤진 열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말을 못하니까 갑자기 벙어리가 된 느낌이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순 백인들만 나오고 한창 성장하는 예민한 나이라 많이 답답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쯤 되는 나이에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엑스트라였는데도 연기로 나를 표현한다는 그 해방감이 대단했다. 연극하면서 이민간 후 처음으로 마음이 편했다. 그 다음해에는 오디션을 봐서 주인공을 따냈다. 그러면서 아, 이게 나한테 맞는구나 하는 생각에 뉴욕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배우의 꿈을 키운 거다. 당시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4시간 걸렸는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버스 타고 배 타고 전철 타고 학교에 가서 방과 후엔 또 바로 발레 수업 받고 태권도 수업 받고.... 그땐 참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게 더 돈을 많이 벌까, 아니면 미국에서 하는 게 나을까, 하고 저울질을 한다. 어쩔 땐 내가 생각해도 징그럽다.(웃음)
김세윤 기자 외국의 연기 수업은 어떤지 늘 궁금했다. 거기선 뭘 배우나. 김윤진 대학에 처음 들어가면 자신을 버리는 훈련을 한다. 그 때까지 예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면 옷도 막 입고 돌아다니고 하는 식으로 자기 버릇, 취향을 다 버리는 훈련을 한다. 2년째는 스타니슬라브스키 메소드 연기를 포함해서 각종 메소드 연기법을 배우고, 3년, 4년째는 무대에 올라 계속 실습이다.
김세윤 기자 자신을 버리는 훈련을 할 때 당신은 뭘 버렸나. 김윤진 숫기 없는 성격을 버렸다. 아버지가 가부장적이어서 집에 들어오면 꼭 한국말만 써야 하는 데다 내 의견을 바로 말하는 데 익숙치 않아서 외국인들 앞에선 더 말이 없었다. ‘쟤는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런 걸 깨려고 노력 많이 했다.
김세윤 기자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대들기라도 했나? 김윤진 대들진 않았지만 혼자 소리 지르고 그랬다.(웃음)
장병원 기자 그때부터 한국에서 연기할 생각을 했나 김윤진 한국에 가서 연기하리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한국말 발음부터가 썩 자연스럽지 않았다. 실제로 처음에 한국 드라마 출연하면서 발음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특히 한자어 단어는 그 뜻을 모르겠더라. ‘토대로 만든’이라는 대사에서 '토대'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언어가 안 되니까 한국에 가서 뭘 해야지 하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정착해서 미국에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김세윤 기자 그런데 어쩌다? 김윤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우연히 뉴욕에 온 한국의 드라마 PD와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밥 먹는 자리에서 그 분이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대본을 한 번 읽어볼 수 있겠냐"고 해서 "실례 아니에요 감독님. 여기서는 다 그렇게 오디션 봐요" 하면서 읽었다. 그게 처음 한국말로 한 연기였다.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한국에 돌아간 뒤로도 계속 연락이 왔다. 이런 드라마 있는데 같이하지 않을래? 언제 올 수 있겠니? 등등. 그러다 마침 교포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다길래 한국에 들어왔는데 정작 그 드라마는 엎어지고 갑자기 <예감>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 그게 또 대박이었다. 처음엔 주인공 역할을 하라고 했는데 큰일난다고, 말도 잘 못하는 내가 하면 드라마 망한다고 고사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서른 두살의 여자를 연기했다. 어울리지 않게 머리는 틀어올리고.(웃음)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코디가 있나 뭐가 있나. 선배들이 소개해줘서 코디 구하고 기획사에도 들어갔다.
장병원 기자 한국에 오지 않고 계속 미국에서 공부했다면 진작에 미국에서 배우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김윤진 글쎄. 한국에서 이만큼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그나마 관심을 가지고 날 지켜본 게 아니겠나. 물론 미국에서 단역을 전전하다가 루시 리우보다 더 빨리 떴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다. 난 한국을 우회해서 온 덕분에 오히려 더 빨리 미국 드라마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운 좋게도 첫 방송부터 대박 아닌가.
김세윤 기자 한국에서 찍은 첫 드라마도 대박, 첫 영화 <쉬리>도 대박, 미국 첫 드라마도 대박이다. 김윤진 그러게. 늘 출발은 좋네. 그럼, 지구력이 좀 딸리는 건가.(웃음)
장병원 기자 처음엔 다들 시행착오를 겪지만 중국권 배우들 중에는 그래도 확실하게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선례들이 많다. 김윤진 그러니까 한국 감독님들이 빨리 할리우드에 오셔서 나를 캐스팅해 줘야 한다.(웃음) 주윤발도 <와호장룡>으로 이름을 알렸지 그 전엔 미국 사람들이 잘 몰랐다. <애나 앤드 킹>이나 <리플레이스먼트 킬러> 같은 영화를 찍었지만 미국 관객들은 큰 관심이 없었다. 영어로 연기하느라 대사에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자기 연기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마치 처음 한국 드라마 <예감>을 찍었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와호장룡>에선 너무 멋있잖아. 리안 감독이 <와호장룡> 같은 영화를 연출하니까 그런 배우들의 장점을 뽑아낼 수 있는 거다. 그러니 한국 감독님들이 미국에 와서 날 캐스팅해 주면 내 장점을 잘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성룡도 할리우드에서 영화 만들기 위해 20년 이상을 기다렸다는데 지금부터라도 한국 감독들이 할리우드 진출을 준비했으면 좋겠다. 할리우드기 때문에 무조건이 아니라 할리우드영화가 전세계로 뻗어가니까 그 대단한 힘을 이용하자는 거다.
김세윤 기자 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자면 드라마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김윤진 TV로 시작해서 일단 얼굴을 알렸으니 성룡처럼 20년은 안 걸릴 것 같다.(웃음) 다행히 난 언어 장벽도 없다. 근데 어딜 가나 중국 배우뿐이니까 그게 좀 짜증이 난다.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시카고>의 롭 마셜이 연출하는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작품이 있다. 장즈이가 주인공 기생 역할을 하고 공리가 장즈이를 괴롭히는 기생을 맡고 양자경이 장즈이를 키우는 기생으로 나온다.
김세윤 기자 어떻게 일본의 게이샤를 전부 중국인이 연기하게 됐을까. 김윤진 그러니까. 게다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배우들도 아닌데. <로스트>가 화제가 되긴 했는지 나에게도 그 영화 캐스팅 제의가 왔다. 근데 너무 역할이 작아. 딱 세 번 나오는데 공리가 장즈이를 괴롭힐 때 옆에서 같이 괴롭히는 역할이다. 갈등을 많이 했다. 야, 너 여기선 아직 신인이잖어, 오디션도 없이 바로 콜이 온 건데 어때? 한번 해보는 거야,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한편으론 아냐. 그래도 한국에서 난 주연급 여배우인데 안 되지. 한 다섯 시간 고민한 끝에 결국 거절했다. 지금도 헷갈린다. 그래도 스필버그 영환데, 거절하길 잘한 걸까?
김세윤 기자 배고프다고 아무 거나 먹으면 탈 난다는 말도 있잖은가. 김윤진 아직은 그렇게까지 배고픈 상황이 아니라 거절을 한 거다. <게이샤의 추억>에서 공리 옆에 서 있던 배운데 누군지 몰라? 하는 말을 듣느니 차라리 괜찮은 저예산 인디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데뷔하는 게 낫겠다 싶다. 운 좋으면 영화제 나가서 상도 탈 수 있잖은가.(웃음) 안 그래도 에이전시에서 한 세 편 정도 추진 중이다. 그런 영화에 내 돈을 투자해서라도 출연하는 게 배우로서 더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장병원 기자 미국의 제작 환경을 직접 경험해 보니 어떤가. 한국과 많이 다른가? 김윤진 사람들이 모여서 열정적으로 무언가 한다는 건 똑같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도 똑같고. 규모의 차이일 뿐이다.
김세윤 기자 배우들에 대한 대접은 다를 텐데. 김윤진 아, 물론이다. 나에게도 개인 트레일러가 제공된다. 이곳은 배우협회 힘이 막강해서 12시간 일하고 나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조항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사실 한국에서도 주연급은 편하다. 다만 조역에 대한 대우는 한국과 천지 차이라고 보면 된다.
장병원 기자 당분간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건가 김윤진 말이 7년이지 무인도에서 해봐야 뭘 더 하겠나. 혹시 아나? 중간에 죽는 역할이어서 돈은 돈대로 받고 한국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을지.
사진 서지형 기자
프로필 1973년 생 | University of Boston 졸업 | MBC 드라마 <예감> 등 출연 | 영화 <쉬리> <단적비연수> <예스터데이> <아이언 팜> <밀애> | 미국 ABC TV 드라마 <로스트 Lost> 출연 중
2004年10月30日 (土) 16時45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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